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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문턱에서 -한경래-

무술 2007. 9. 19. 09:59
처서(處暑)를 지나니 제법 선선한 기운이 돌고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을 떨며 바쁘게 들린다. 조락(凋落)의 계절임을 실감한다. 아직 한낮 땡볕이 삼복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선선해질 것이라는 예고로 처서란 절기를 마련한 선각자(先覺者)들이 참 용케 느껴져 신기하기만 하다. 처서의 한자 ‘處’의 뜻이 이럴 때는 ‘그치다’로 쓰여져 ‘이제 여름은 끝나고 가을의 길목으로 든다.’란 표현이고 보면. 한자의 다의적 변용으로 중국인들의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속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게 한다.

 가을의 단풍은 한해를 마무리하고 새 봄의 만남을 기약하는 예쁜 몸짓이고, 수컷 귀뚜라미의 애끊는 연가는 해질 무렵의 황홀한 낙조에서 내 꿈을 더듬게 한다.

 나무도, 곤충도 인간과 별 다름없이 자연의 섭리에서 조금의 빈틈도 없이 돌고도니 조물주의 존재가 참으로 놀랍게 느껴질 뿐이다.

 단풍은 이제 두터운 녹색의 꺼풀을 벗어 던지고 그 본래의 아름다운 각각의 자태를 한껏 뽐내면서 동면의 장고에서 새 봄의 꿈을 수놓을 준비를 서둘고, 귀뚜라미의 애타는 러브송도 그러하다. 수컷의 종족 보존의 꿈이 그토록 애절하니 어찌 인간의 꿈과 다르겠는가.

 어느 수필가의 글에서 노을이 붉은 것은 곧 해가 진다는 것을 뜻한다고 했듯이 인간 삶의 순환도 또한 그러하다.

 나는 어떤 색깔로 이 가을을 맞게 될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마 우중충한 색일 것이란 짐작이 앞선다. 애써 뿌린 씨앗도, 땀 흘려 가꾼 결과조차도 또렷하지 않으니 입맛이 쓸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썩 고울 단풍도 야무진 귀뚜라미의 꿈같은 미련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 만사가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 정답이라 하니 내 삶의 부실로 봐 그러하리라 생각함은 당연하다.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8월 처서의 절기를 전후해서 입동 즈음에 막을 내린다고 한다.

 그들 수컷의 날개 부비는 소리를 울음이라고 표현하나 그것은 암컷을 부르고 찾는 그들의 애타는 연가(戀歌)라고 함이 더 알맞을 것 같다. 상대가 머문 거리의 정도에 따라 소리 강도가 다르다고 하니 예사롭지 않음은 물론 그 꿈이 오로지 다음 해 봄에 태어날 새끼를 얻는 것이라니 더욱 놀랍다.

 귀뚜라미의 생태 설명에서 말하기를, 소리가 요란할 즈음 암컷은 긴 산란관을 땅속에 꽂고 여기저기 여러 개의 알을 낳는다. 땅속에서 추운 겨울을 지낸 따스한 5월경에 햇살을 받으며 땅속에서 부화하여 땅 위로 나오며, 어린 것은 주변의 풀과 이슬을 먹다가 차츰 더 자라면서 여러 가지 먹이를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그들이 성충이 되려면 일곱 번의 탈피 과정이 있는데 그것이 완성되어야 비로소 울게 되고 그 때가 8.9월 경이라고 한다.  사랑의 결실로부터 긴 침묵으로 내실을 기한 성장이 완료되는 2.3일 후부터 울어 사랑 찾은 결실로 일생을 종결하는 셈이다. 매미 또한 그러하다고 하나 모두가 자연 순리를 좇고 있다고 하겠다. 하긴 그들의 소리가 울음인지 노래인지는 알 수 없지만 듣기에 따라 묘한 여운을 남길 것도 같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니 하등 생물과 동일시 할 수는 없으나 비록 생의 길고 짧음만 다를 뿐 자연물임에는 같으니 어찌 자연 순리를 우리들이라고 거역할 수 있겠는가 싶다.

 오늘날 지구의 온난화로 생태 변화가 기존의 상식을 크게 벗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은 곧 인간들의 오만이 부른 재앙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의 자연권이 온대가 아니라 아열대화로 변질된다는 과정에서 아름다웠던 사계절의 순환은 벌써 물 건너간 느낌이 이제는 새롭지 않다.

 이렇게 자연이 빠른 속도로 돌변하는 만큼 인심도 따라 점점 야박하고 어수선한 것이 어제 오늘이 아니라 심히 섬뜩하기만 하다.

 머지 않아 귀뚜라미 소리도 자취를 감출 것이고 산야에 단풍이 곱게 물 들면 그 산길 들길 속을 걸으며 지금껏 살아온 내 자취를 다시 한번 상기해 보려 한다.